아침 해가 마당을 밝히면 나는 여전히 부엌으로 향한다. 솥단지를 살피고, 장독대에서 장을 떠오며, 하루의 일을 준비한다. 손끝에 익은 일들이지만,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종가집 며느리로 살아온 70년, 내 삶은 언제나 준비와 책임의 연속이었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이 집으로 시집왔다. 마당이 넓고 기와가 단정한 집, 대문 안팎으로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손을 곱게 모으고 앉아 어른들의 말씀을 들으며, 새색시답게 굴어야 한다는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이 집의 법도를 배우려면 오래 걸릴 거야.’ 시어머니의 말씀이 무겁게 가슴에 내려앉았다.
그 시절, 며느리는 집안의 기둥이면서도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음식을 장만하고, 손님을 맞이하고, 제사를 준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작은 실수라도 할라치면 집안 어른들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따라왔다. 새벽부터 일어나 하루 종일 손을 놀려도, 칭찬보다는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서운함보다는 그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며 견뎠다.
제사는 가장 큰 일이었다. 긴 상을 차리고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는 날이면, 종갓집 며느리로서 내 자리를 다시금 실감했다.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음식을 차리고, 손님을 맞이하고, 어른들의 말씀을 받들었다. 때로는 버거운 순간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집안의 정신과 전통을 지켜가고 있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시대가 바뀌었다. 며느리들이 예전처럼 제사를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집이 많아졌고, 가족들의 모임도 예전처럼 엄격하지 않았다. 나 또한 이제는 무거운 일을 내려놓고, 자식들과 손주들의 손길을 받으며 지낸다. 하지만 가끔은 장독대 앞에 서서 오래전 시어머니가 해주시던 말씀을 떠올린다. “음식 하나에도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대접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마음이 편하지.”
70년을 돌아보니, 나는 긴 강을 건너온 것 같다. 때로는 깊은 물살에 휘둘리고, 때로는 고요한 강변에 앉아 숨을 돌리기도 했다. 기쁨도, 아픔도, 서운함도 많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순간이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오늘도 나는 장독대 앞에서 간장을 한 국자 떠본다. 변한 것 같아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정성을 다하는 마음, 그리고 이 집을 지켜온 시간들. 그것만큼은 여전히 내 안에 깊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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